술을 마시면 갈증 때문인지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버릇이 있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4시에 눈이 떠지더군요. 옆에서 새큰새큰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매우 귀여웠지만 정말 이놈에 바가지 머리는 하루가 지나도 익숙해 지질 않아요(-_-a)
그녀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 올리니 스르륵 눈을 뜨며 잘 잤냐는 인사를 하는 그녀.
깨워서 미안. 잘 잤어?
벌써 일어난 거에요? 아직 4시밖에 안 됐는데...
아~ 목마르다. 차 마시고 싶어.
그럼 사러 나갈래요?
그래.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니 동이 트기 전 어두컴컴한 거리가 약간은 으스스했지만, 겨울 찬 공기가 얼마나 상쾌하든지 몸과 마음이 날아갈 것만 같았어요.
선선하니까 기분 정말 좋다.
전 죽을 거 같은데요...? ( ̄□ ̄;
저에겐 늦가을 정도의 후쿠오카 날씨가 그녀에겐 뼛속까지 사무치는 한겨울 추위였나 봐요. 물 맞은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어요.
뛰니까 안 춥지?
그녀는 갑자기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서더니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고 나서 제 볼에 쪽~하고 뽀뽀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ノ∀`♥) 어제는 긴장해서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는데 오늘은 한층 좋아진 느낌이었어요. 어제 술집을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덕(?)에 호텔 주변을 대충 외워버린 그녀와 나. 편의점은 헤매지 않고 바로 찾을 수 있었죠(-_-v)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서 호텔로 돌아왔는데, 사온 것은 거의 먹지 않고 졸린 눈을 비비며 다시 침대에 누웠어요. Love한 시간을 보내고 그녀 품에 안긴 채 잠이 들었나 봐요. 일어나 보니 10시. 서둘러 샤워와 준비를 하고 호텔을 나선 시간이 12시쯤. 아침에 너무 뭉그적 거렸나 봅니다. 게다가 하필 오늘 마법에 걸린 그녀는 배가 아프다 하고...
너무 배가 고파서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텐진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글쎄요.. cielo가 좋은 걸로요.
그럼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음.. 잘 모르겠어요. 아무거나요.
우유부단한 그녀의 행동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안 잡히더군요. 그래서 어제 친구 M짱이 '이찌란(一蘭)'이란 라면집이 유명하다고 알려준 생각이 나서 속도 풀 겸 가보기로 했죠. 그녀가 가지고 있던 후쿠오카 맛집이란 책에는 가게의 위치가 자세히 나와있지 않아서 '왔다 갔다 횡당보도를 건넜다 되돌아왔다, 갔던 길 또 가고 들어갔던 골목 또 들어가고 나오면 제자리고...ㆀ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찾았어요. 오늘도 엄청 헤맬 거 같은 예감 ̄∀ ̄*)
배고픈 상태에서 1시간이나 헤매니 이젠 배고프다는 감각마저 사라진 상태. 가게 앞에는 한눈에 봐도 50명은 거뜬히 넘을듯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어요. 유명한 가게이니 어쩔 수 없지. 기다리는 수밖에...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이곳은 한국 TV에서도 많이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남에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맛에만 전념하라는 뜻에서 독서실처럼 칸칸이 막혀 있답니다. 먹으면서 느낀 거지만 참 좋은 시스템인 건 확실한데, 저에겐 3개월 만에 처음 만난 여자 친구랑 모처럼만의 데이트에 '그녀와 마주 보고 얘기할 수 없을 뿐이고, 일편단심 라면만 먹을 뿐이고, 나는 다만 외로울 뿐이고!' 뭐, 그랬다는...
면의 두께, 수프의 매운맛, 진한 맛, 파의 양 등을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어 좋았어요. 돈코츠 수프를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도 그나마 거부감 없이 드실 수 있을 듯... (참고로 저와 그녀 모두 돈코츠 라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ㅋ)
라면집을 빠져나와 그녀와 어디를 갈까 정하는데 'cielo가 가고 싶은 곳에 가자'는 그녀의 우유부단한 모습에 또 한 번 실망을 했죠. 게다가 말도 잘 안 하니 속이 터질 지경. 우연히 가이드북에 펼쳐진 페이지에 다자이후(大宰府)가 소개되어 있어 그곳에 가기로 했어요. 만나기 전에는 후쿠오카 타워에 가자, 시사이드 모모치에 가자,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로 결정하다니, 대충도 이런 대충이 없죠.
입구 앞에는 상점가가 들어서 있어 관광지란 느낌이 물씬 풍겼어요. 안에 들어가니 공원에서 할아버지와 원숭이의 재주 부리기가 한창이었고, 더 안으로 들어가니 신사 앞에 많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 아저씨(?)가 손에 먼지 떨이개(?!) 같은 것을 흔들면서 쭝얼쭝얼 짓거리고 있었는데...
농담 삼아 혹시 주술사냐고 그녀에게 물어보니 별로 관심 없다는 듯 가볍게 알려주고 지나치더군요. 뭐였는지 금세 까먹었지만. 게다가 뒤에서 갑자기 백마가 나타나서 화들짝 놀랬다는...(_ _;;) 얼마나 크던지 약간 공포감에 휩싸였었죠.
그녀와 느긋하게 산책을 하다 보니 작고 허름한 유원지가 나왔는데, 사람도 없고~ 놀이기구는 움직이지도 않고~ 슬쩍 봐도 초등학생 이하가 갈법한 유원지. 놀이기구가 움직이지 않는 유원지라니...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ー ̄; 게다가 신사 옆에 유원지라니 참 이상한 조합...ㆀ 큐슈 국립박물관에서 폐관 시간까지 둘러보다 후쿠오카로 돌아왔습니다.
호텔에서 조금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밖에 나왔죠. 일본에 왔으니 메뉴는 스시! 어차피 어디가 맛있는지 잘 모르겠고, 안다고 해도 '지도를 못 읽는 두 여자'였기에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 아저씨께 유명한 스시집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호텔에서 가까운 1번째 스시집에 도착해서,
기사 : 이런, 닫혀 있네요.
1번째 스시집에서 조금 떨어진 2번째 스시집에 도착해서,
기사 : 음... 여기도 닫혀 있네요. 일요일이라서 영업 안 하나?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지만, 여기에서 내려도 곤란하니까 다음 가게로...
하카타역 방면에 있는 3번째 스시집에 도착해서
기사: 허.. 참, 곤란하게 됐네. 여기도 안 하는 거 같네요.
기사님이 무선으로 연락을 취하더니 나카스에 가면 있을지도 모르다 하여, 어차피 여기까지 오게 된 거 나카스까지 가지로 했어요.
나카스 4번째 스시집에 근처에 도착해서,
기사 : 여기에서 봐도 불도 꺼져있네요. 한집 더 둘러볼까요?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5번째 스시집에 도착해서,
기사 : 역시 이곳도 영업 안 하네요. 이 이상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님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우리는 꽤 비싼 택시요금을 지불하고 나카스에 버려졌답니다(...)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채운 채, 큐슈 제일의 환락가라고 가이드북에서 본듯한 느낌이 들어 '뭐, 여기서 놀아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걸어도 걸어도
.
.
.
아무것도 없다 ( ̄▽ ̄;)
술 취한 아저씨가 비틀비틀 걸어 다닐 뿐 큐슈 제일의 환락가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용한 거리. 가이드북에 나왔던 포장마차나 멋진 레스토랑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일요일이라 안 하는 거냐? 대체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우리 좀 어떻게 해줘~~
할 수 없이 호텔로 다시 돌아와 우리의 구세주인 '호텔 프런트'에 가서 근처 맛있는 스시집이 있냐고 물어보니 테이블 밑에서 주섬주섬 책자를 꺼내기 시작했어요.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더니 딱 한 군데가 영업을 하고 있는데 1시간 반 후면 문을 닫는다는 거예요. 지도에 동그라미를 치고 주소를 적으며 택시로 5분 거리니까 괜찮으면 가보라고 지도를 넘겨받았답니다.
저는 1시간 반밖에 남지 않아서 단념하고 있었는데, 오늘 계속 스시가 먹고 싶다고 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그녀가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아 빨리오라며 손짓을 하는 거예요. 택시를 타고 그녀가 기사님에게 지도를 내밀려 '여기로 가주세요'라고 말하니, 기사님의 강렬한 한마디가 우리를 벙찌게 했죠.
"노안으로 안 보이는데 어쩌나...(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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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Σ( ̄□|||| 할아버지 농담하는 거죠?
안경은 왜 쓰고 있는 건데요!!!
게다가 안 보이면 운전하지마세요!
누구 죽일 일 있어요?!!!!
식겁해서 그 택시에선 내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다른 택시를 잡아타 그녀가 다시 기사님에게 지도를 건네주니 "아아, 대충 알겠네요"라는 대답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님이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이 건물 2층이에요"라고 하여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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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판 모르는 남의 집이 아니더냐~?ヽ( ´∀`)ノ
택시는 이미 떠나버렸고, 정말 쫓아가서 한마디 하고 싶었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너무 화가 나서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미친이의 실소 같은 거.. 허탈한 웃음만이 허공을 맴돌았죠. 우린 얼마나 더 헤매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거지?
미안해요.
왜 사과하는 거야? sereno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스시는 내일 먹으러 가요. 배고프죠. 이제 어떻게 할까요?
시간도 늦었고, 거기 갈래?
그렇습니다. 어제 갔던 술집에 또 갔더랬죠. 그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택시를 타면 될 것을 산책한답시고 걷다가 요상한 길로 빠져서 또 엄청 헤매었다는 일화가...ㆀ 뭐, 택시에 대한 불신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도 했고요. (결국, 택시 탔습니다 -0- 굴욕이죠)
이틀 연속 가서 그런지 벌써 단골손님 대접을 해주더군요. 요리도 맛있고, 점원들도 모두 친절해서 마음이 편한 곳이었어요. 엄청 많은 음식을 주문하고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이런저런 술을 '혼자' 섞어 마시며, 좀 전에 이상한 운전기사 두 명을 안주 삼아 "아까는 열 받았었는데, 생각해보면 재밌다. 추억도 되고"라고 말을 걸어도 그녀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을 뿐. 독버섯 상태였어요.
그녀를 좋아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오늘 하루 종일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도 안 하고 계속 어두운 표정으로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저도 그리 유쾌하진 않았거든요. 어떻게든 짧은 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나름 많이 노력했는데, 술집에서 본 그녀의 모습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죠.
말이 없는 그녀에게 저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취하고 싶어서 술을 퍼마신 뒤 호텔로 돌아가 잘 자라는 말만 하고 그냥 자 버렸어요.
아~ 몰라 몰라 몰라~ 될 대로 돼라!!!!
기록 : 이 글은 2009년 2월 25일 3시 30분에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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